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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자 : 조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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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2023년 알래스카 파견
AYP 참가를 결심하며
처음 이 프로그램을 참여하고자 결심했을 때 한 가지 목표가 있었다면 바로 이 선택을 미래에 후회하지 않는 것이었다.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를 떠올리며 감히 한국 고등학생의 현실에 충실하지 않고 미국 생활에 대한 동경이나 로망에 이끌려 한 선택이라고 생각하면 어떡하나 싶었다. 선생님들은 나에게 대학교 가서도 교환학생으로 갈 수 있을 걸 굳이 농어촌 전형 포기하면서 지금 가야겠냐고 하셨다.
맞는 말처럼 느껴져서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는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이 기회로 얻게 될 경험들이 평생 내 인생에 남을 것처럼 느껴져서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10개월이 지나 다시 한국에 돌아온 시점에 나는 후회하지 않을 거냐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알래스카 도착
알래스카로 배정을 받고 처음엔 놀랐지만 오히려 좋다고 생각했다. 미국에서 살다온 사람들은 많지만 알래스카에 살다온 사람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왕 새로운 경험하러 갈 거 알래스카 정도는 가줘야 하지 않나 싶었다. 8월 12일, 알래스카에 처음 도착했을 때 흐린 날씨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한달 내내 비가 내렸다. 8월에 입으려고 가져간 반팔과 반바지는 단 한 번도 꺼내지 못하고 그렇게 겨울이 왔다. 알래스카의 겨울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춥고 더 눈이 많이 왔다. 10월에 첫눈이 내렸는데, 한번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매번 폭설로 이어져서 학교가 쉰 적도 더러 있었다. 처음 보는 양의 눈 때문에 신이 나서 사람만한 눈사람을 만들고 썰매를 타던 기억이 난다. 한번은 지붕이 무너질 것에 대비해 지붕 위로 올라가 5시간 동안 삽질한 적도 있었다. 몇달 동안 쌓인 눈은 도로 가장자리에 벽처럼 남아 반년동안 녹지 않았다.
가족으로 대해준 호스트 가족들
나의 호스트 패밀리는 과분하게 좋은 분들이었다. 거의 1년 동안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떨어져 지낸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분들 덕분에 가족들에 대한 큰 그리움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것 같다. 호스트 부모님은 나를 가족의 구성원이자 친딸처럼 대해주셨고, 나도 “mom” 혹은 “dad”라 부르며 친부모님처럼 따랐다. 호스트 엄마는 항상 나를 보며 웃어주시는 다정하고 활발한 분이셨다. 호스트 엄마가 이곳저곳 데려다주시고 데려와주셨기 때문에 내가 다양한 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다. 알래스카를 떠나기 전 날은 일요일이었는데, 교회가 끝날 때 일어나서 모두 나에게 기도해주자고 제안하시며 눈물을 훔치시는 모습을 보고 나에게 두번째 엄마가 생긴 기분이었다. 호스트 아빠는 알래스카 주의회 의원이셨다. 그래서 반년 동안 주도에서 생활하셨는데, 나와 호스트 시스터가 주도를 방문했을 때 알래스카 주의회 사무국에서 일일 직원으로 의원들의 쪽지를 전달하는 경험을 해보았다. 호스트 아빠는 항상 나에게 새로운 경험을 시켜주려고 노력하시는 분이셨는데, 호스트 아빠와 쌓은 추억들은 앞으로 잊지 못할 것 같다. 호스트 시스터는 2명이 있었는데, 한 번도 자매를 가져본 적이 없는 나에게 색다른 경험이었다. 그 중 한 명과는 방을 함께 사용했고, 셋이서 서로 옷을 빌려입거나 요리를 해먹거나 영화를 보는 등 친자매처럼 어울릴 수 있었다. 오빠 한 명 밖에 없었던 나에게 생긴 자매들이기 때문에 이 인연을 오래 이어갔으면 좋겠다.
호스트 패밀리는 농장을 운영하셨다. 큰 꽃밭을 가꿔서 꽃 배달을 하시는 호스트 엄마를 위해 가끔 꽃밭에서 일을 도와드리곤 했다. 그 외에도 소 두 마리, 돼지 여러 마리, 닭 여러 마리, 뱀 한 마리, 토끼 네 마리, 개 두 마리에 고양이 두마리까지 동물들로 둘러쌓인 집이었으며 매일 저녁 작은 동물들에게 밥 주는 집안일을 담당하기도 했다. 가족들이 매일 아침, 저녁으로 동물들 밥을 주고 돌보고 관리하는 모습을 보며 동물 몇 마리 키우려면 참 부지런히 정성껏 키워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알래스카에 도착한 지 일주일도 안되어 돼지를 잡았을 때는 내가 살면서 또 경험할 수 있는 일일까 싶었다.
미국 고등학교
미국 알래스카의 고등학교는 내가 상상했던 것과 꽤 달랐다. 응당 미국의 학교라면 선생님과 학생의 오고가는 토론이나 모둠 수업이 많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코로나의 영향인지 학교에서 나눠주는 크롬북으로 개인 과제만 제출하는 수업이 많았다. 선생님들도 ‘수업’을 하신다기 보다는 학생들이 알아서 배우는 것을 도와주는 느낌이 들었다. 아이들도 학교에 공부를 하러 온다기보단 방과후 스포츠팀에 참여하려면 학교에 출석해야 하므로 수업에 나오곤 했다. 이 점이 한국의 학교와 가장 큰 차이점인 것 같다. 물론 주마다, 학교마다 다르겠지만 미국의 고등학교는 공부보다는 스포츠에 더 열심이었다. 스포츠 팀에서 좋은 성적을 내면 대학에 갈 때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는 점도 한 몫 한 것 같다.
덕분에 나도 세 가지 시즌 중 두 시즌에 참여하여 농구와 축구를 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사실 농구나 축구를 제대로 배워본 적은 없지만 워낙 작은 학교인지라 서브 선수들이 필요해서 처음 들어오는 사람들도 환영해주었다. 매일 방과후 2시간씩 연습하고 원정경기를 다니면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좋은 추억도 많이 남길 수 있었다. 만약 이 프로그램에 참여할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스포츠 팀에 참여하라고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다.
기억에 남는 또 다른 학교 경험은 댄스 파티였다. 첫 파티 때는 드레스 살 시간도 없어서 중고 옷가게에서 급하게 구했다. 게다가 학교 댄스 파티에서 틀어주는 음악은 한국인들이 흔히 듣는 팝송과는 너무 달라서 아는 노래가 별로 없었던 것이 아쉬웠다. 그 이후로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서 다음 댄스가 열리기 전까지 노래들을 외웠더니 미국에서 실제로 인기있는 노래들을 많이 알게 되었고 음악 취향에도 영향을 주었다. 학교 댄스는 한국 고등학교에서는 상상도 못할 클럽 같은 느낌이었는데, 내 친구들이 댄스파티 선행학습이 되어있는 라틴계 여자애들이었기 때문에 항상 끝까지 남아서 즐기고 갔던 기억이 있다.
알래스카의 특별함
알래스카에 배정받은 것은 처음에 기대했던 것보다 더 특별한 행운이었다. 미국 본토와 비교했을 때 알래스카는 더 야생적이고 보수적인 성향이 강하다고 느꼈다. 미국하면 떠오르는 다양성도 별로 없었다. 기독교를 믿는 백인들이 대부분이었고, 가끔 알래스카 원주민 후손들도 보였다. 때문에 미디어에서 보던 미국의 모습과는 차이가 있었지만, 그 또한 신기했다. 알래스카에서는 총기나 마약류를 흔하게 접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호스트 패밀리의 보수적인 성향이 나같은 타국에서 온 교환학생에게는 안전한 환경으로 작용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알래스카의 특장점은 바로 자연이었다. 눈이 반년동안 녹지 않아서 그렇지 알래스카의 여름은 아름답다고 유명해서 관광객들이 많이 몰려온다고 한다. 커다란 무스나 호저같은 우리나에서는 생소한 동물들이 길거리에 그냥 지나다니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야생 토끼가 길목에 뛰어다니고 강에는 수달이 헤엄치곤 했다. 나는 한번도 본 적 없지만 야생곰도 가끔 보인다고 들었다. 제일 큰 도시인 앵커리지마저 대체로 낮은 건물들이 띄엄띄엄 서 있기 때문에 본토와 비교했을 때 도시화가 잘 되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자연에 있어서는 알래스카에서 볼 수 있는 희귀한 것들이 참 많았다. 한겨울에는 오로라를 볼 수 있었다. 호스트 엄마가 급히 부르셔서 반팔 차림으로 영하 15도에서 오로라를 봤던 적이 있었다. 영화에서 보던 것보다 더 화려하고 역동적인 오로라였다. 밤하늘 양끝을 잇는 긴 선이 보였고 하늘 정중앙에서는 초록색, 보라색, 빨간색 소용돌이가 홀로그램처럼 빠르게 움직였었다. 호스트 패밀리마저 알래스카에서 평생 살면서 저렇게 화려한 것은 처음 본다고 하셨다. 아마 나의 10개월의 교환학생 여정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다. 호스트 아빠가 일하시는 주도에 갔을 때는 빙하를 보러 갔었는데, 그냥 얼음보다 잘 녹지도 않고 주변에서 한기도 느껴지지 않는 게 빙하 동굴 안에서 살아도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알래스카는 나에게 버킷리스트를 이뤄주는 특별한 곳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난 후
한국으로 돌아온 지금은 과거와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라서 미국에서 1년을 보냈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믿겨지지 않는다. 그래서 소중한 추억과 인연을 잊지 않으려고 앞으로도 호스트 패밀리와 친구들과 연락하며 지내려고 한다. 타지에서 처음 보는 가족 집에 얹혀 살며 처음 보는 학교에 가서 처음 보는 친구들과 친해져야 하는 것은 쉽지 않다. 모든 어려운 상황들을 심지어 영어로만 헤쳐나가야 한다는 것은 큰 도전이다. 그럼에도 혼자 밥 먹지 않기 위해 첫날부터 친구를 사귀었고, 어색한 상황을 빠져나가기 위해 틀릴 것을 각오하고 영어로 말을 뱉었으며, 본인들의 사적인 공간에 나를 허용해준 호스트 가족들을 위해 귀찮은 날에도 영하 20도에 밖으로 나가 동물들 밥을 줬다. 이를 통해 나는 변화를 만드는 것은 무조건 행동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배웠다. 자기 전에 침대에 누워 이렇게 해야지, 저렇게 해야지, 생각하더라도 막상 상황이 닥쳐오면 겁이 나서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건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새로운 환경에서는 가만히 있어도 나의 속마음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으므로 말 한 마디 뱉고, 행동 하나 하는 것이 얼마나 큰 변화와 영향을 가져다 주는지 크게 느낄 수 있었다. 방과후에 심심하다면 스포츠 팀에 가입하고, 성적에 문제가 생기면 선생님께 찾아가 이야기하는 이런 행동들이 결국엔 아웃풋을 만들었다.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몸 밖으로 뱉는 것은 과연 의지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지만 한 번을 해내면 두세번째는 쉬웠다. 미국에서의 이런 배움이 앞으로 나를 추진력과 행동력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에 큰 도움이 줄 것 같다.
영어 회화 실력도 생각보다 많이 늘었다. 교환학생을 결심하게 된 주된 목적은 경험적인 부분이 더 컸지만 영어 실력 향상에도 확실한 효과를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듣기 평가와 다르게 원어민들은 말도 빠르고 슬랭이나 비유적인 표현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대화를 알아듣고 끼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 수록 영어로 농담도 하고 심지어 영어로 꿈을 꾼 적도 있었다. 초반에 머릿속으로 번역하고 문법적으로 맞는 말인지 확인하곤 했었는데, 후반으로 갈수록 머리를 거치지 않고 뱉을 수 있게 되면서 영어를 문법적인 방식이 아니라 그냥 자연스러운 언어로 접근하게 되었다.
미래를 준비하며
미국 사립고등학교나 호주 유학도 고려해보았지만 일 년이면 충분히 경험했다고 판단해서 원래 다니던 한국 고등학교에서 대입을 열심히 준비해보려고 한다. 알래스카에서의 기억들은 입시하며 지치는 순간마다 찾게 되는 기억이지 않을까 싶다.
알래스카를 떠나기 직전에 나는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겠다고 결심한 내 선택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만약 내가 한국에 남았다면 나의 두번째 가족이 된 이 사람들이 존재했는지 조차도 몰랐을 것이고 알래스카는 일년 내내 눈만 내린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미국 사람들은 다 개방적이고 미국드라마처럼 산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오로라나 무스를 볼 일도 당연히 없었을 것이다. 물론 큰 선택이었지만 그 선택 하나로 내 시야가 이렇게 넓어질 수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하다. 평생 한 동네에서 살며 내 세상이 전부인 줄 알았던 나는 저 멀리 미국 알래스카의 또 다른 작은 마을에서 지내며 처음 보는 가족의 삶에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알래스카에서 쌓은 추억들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값진 추억들이 되었고, 새로 만든 인연들은 경기도의 작은 동네에 한정돼있던 내 세상을 전 세계로 넓혀주었다. 같은 일년이라 하더라도 한국에 남았다면 이만큼 성장하고 배우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교환학생에 대한 내 선택에 조금의 후회도 없다. 오히려 누군가가 말릴 때에도 끝까지 밀고 간 것이 잘한 결정이라고 스스로 칭찬해주고 싶다. 운이 좋게도 좋은 환경에서 좋은 사람들과 아무나 할 수 없는 경험을 했음에 정말 감사하고, 나에게 좋은 추억을 선물해준 새로운 인연들에게 나 또한 보답하고 싶다.